사생활 폭력의 또 다른 주역[김상호 교수]
인쇄매체가 일반적이던 시기에 라디오가 등장하면서 미디어 생태계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했고, 이후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또 다시 변화를 겪었다.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더욱 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어느 미디어라고 할 것 없이 기존 미디어는 인터넷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전면적인 재편을 하고 있는 중이다.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어른과 아이들의 영역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던 사회분위기는 연령층을 가리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전달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노출되면서 어른들만 알던 은밀한 영역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이 결과 아이가 아이답지 않고 어른이 더 이상 어른답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즉, 내가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장소 감각을 상실한 상태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이런 미디어 생태계의 재편은 텔레비전의 지닌 힘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며, 수용자들의 변화는 그것에 대한 반응일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미디어 생태계의 재편과정에선 수용자들은 단순히 반응을 보이는 대상을 넘어 재편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미디어 생태계에서 '능동적인 수용자'라는 말은 이제 식상한 문구가 되어버렸다. UCC를 정점으로 나타나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수용자는 이제 현재의 미디어 생태계를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말이다. 'Web 2.0', '미디어 2.0' 과 같은 신조어들은 수용자의 참여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한 현재의 미디어 상황을 지칭한다.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위용도 전 세계의 사용자들이 참여해서 만들어 나가는 위기피디아(Wikipedia)라는 온라인 백과사전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할상황이다. 이처럼 능동적 수용자는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의 핵심이며 개인의 힘을 넘어 집단지성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이런 밝은 면이 전부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수용자의 능동성은 무차별한 폭로성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또 다른 주역으로 수용자를 몰고 간다.
인터넷 이전의 미디어 생태계에서는 특정 연예인이나 인물의 사생활에 대한 공개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수용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해졌다. 이를 다른 미디어들이 추가적으로 몇 차례 보도를 하고 그것으로 대부분 종료되는 식이었다. 지금의 미디어 생태계는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능동적인 수용자가 있는 것이다. 최근 SBS의 토크쇼에서 탤런트 김혜성이 '이효리보다 예쁜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하자 불과 몇 시간 뒤에 인터넷에 그 여자 친구와 찍은 사진이 돌아다녔다. 그 다음엔 스포츠 신문에 이러한 사태의 전개과정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기사와 내용이 다시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 순위에 오른다. 시작은 텔레비전에서 했지만, 재생산과 확대 공급은 수용자들이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전국 도처에 산재한 많은 능동적 수용자가 개인의 사생활의 범위를 완전히 해체시켜버린다.
텔레비전 토크쇼와 아침 프로그램 등은 사생활 폭로전의 뇌관이며, 한번 시작한 폭로의 폭발은 인터넷을 통해 오래도록 계속된다. 이어 피해 당사자의 힘든 뒷모습은 또 다시 연예 프로그램의 좋은 소재로 등장한다. 폭로의 고리는 계속 순환 중이다. 이것이 능동적 수용자로 재편된 미디어 생태계의 일면이다.
적극적인 수용자로 무장한 인터넷 미디어 생태계는 개인의 머리를 뛰어넘는 집단 지성을 만들어내지만, 반대로 피해 당사자가 감당하기 힘든 집단 폭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우리 주위에는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려 사회에 알려지길 기다리는 소외된 작은 목소리이 넘쳐난다. 적극적인 수용자들이여, 연예인의 사생활은 접어두고, 사회의 부조리를 능동적으로 폭로하자.
- 김상호 / 대구대 교수
출처 :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