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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을 아시나요?[김상호교수_영남일보]

등록일 2010-12-21 작성자 임남균 조회수 3138
'석호필'이라는 사람을 아시는지? '육백만불의 사나이'와 '원더우먼' 세대는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최근 한 미국배우가 인천공항에 내려서자 열혈 한국 팬들이 피켓을 들고 그를 맞이했다.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에게 '희동구'라는 한국식 이름을 붙여주며 애정을 표현하던 것처럼, 석호필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연배우 앤트워스 밀러의 극중 이름인 '마이클 스코필드'에 대한 한국 팬들의 애정이 탄생시킨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단지 광적인 팬들끼리 공유하는 특정한 코드가 아니라 현재 한국 대중문화의 지형을 읽는 중요한 코드의 하나이다. 이 코드는 바뀐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낸 새로운 대중 문화의 생산과 유통 패러다임을 설명해 줄 키워드다.

대중문화의 가장 활발한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젊은세대 사이에서 '미드'라는 약어로 통용되는 미국드라마의 본격적 소비는 초고속 인터넷의 일상화와 함께 시작된다. 한때 인기가 있었던 'X-파일'과 지금의 인기 미드들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말이다. 'CSI' '위기의 주부들' '프리즌 브레이크'는 지상파를 타기 전에 케이블TV에서 방영된 것들이다. 그런데 케이블TV에서 방영되기 이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이들 프로그램에 대한 마니아들은 형성되어 있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심지어 번역까지 이뤄지는 동호인 카페를 운영해왔다. 이것은 다른 어떤 접촉 창구도 없이 오로지 지상파 방송사의 더빙을 통해서 접하던 '육백만불의 사나이'와 케이블의 특정 채널을 통해서 방송된 뒤, 지상파에서 다시 방송되는 'X-파일'이나 'ER'와 같은 드라마와는 그 전달과 수용의 경로를 근본적으로 달리 한다. 지금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국 드라마들은 지상파에서 방송된 것들도 꽤 있지만, 대중 문화적 수용의 사이클의 대부분은 인터넷을 통해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인터넷에서 형성된대중적 유행의 요구를 지상파 방송이 뒤늦게 수용한 셈이다. 주도권은 이미 지상파의 외화 전문가들에서 미드를 사랑하는 인터넷 사용자들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지금의 미국드라마 열풍 이전에도 케이블TV를 통해 인기를 얻은 '프렌즈'나 '섹스 앤 시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일부 수용자들이 이미 방송된 프로그램에 대해 댓글을 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열혈 미국드라마 수용자들은 케이블이나 지상파 방송사의 공급을 기다리지 않는다. 파일 공유사이트나 특정 카페와 같은 자신들만의 공급과 유통방식으로 케이블과 지상파의 공급 이전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새로운 시리즈를 이미 시청하고,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방송사의 문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미드의 유통을 통제할 수 없다. 지상파에서는 한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드라마 주인공을 팬들은 공항에서 기다리고, 그 주인공이 지상파 광고에 버젓이 출현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대중문화 유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인터넷 시대의 수용자들은 그리 재미있거나 흥미롭지 않더라도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촬영 직전에 급히 완성된 쪽대본으로 졸속 제작한 한국 드라마를 더 이상 참아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탄탄한 스토리, 시선을 끄는 다양한 촬영기법 등 수용자의 요구는 한국과 미국 드라마를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제작 환경은 이러한 수용자의 요구를 따라가기엔 치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물론 문화산업에 대해 긴 안목을 지닌 투자마인드가 부족하다는 것이 그 치명적 한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이처럼 바뀐 패러다임을 전혀 위기로 느끼는 것 같지 않은 제작자들의 위기의식이다. 그렇다고 너무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는 말자. 석호필을 생산해낸 인터넷 세상은 여러 한국 드라마의 폐인도 이미 많이 생산했으니까.

- 김상호 /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출처 :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