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호의 대중문화 읽기] 말랑말랑해지는 텔레비전_영남일보
등록일 2010-12-21
작성자 임남균
조회수 3088
정확한 정보와 공신력을 바탕으로 정보를 전달한다고 믿어왔던 아나운서들이 연예인이 주로 해오던 영역에 진입하고 있다. 연예 오락물에 참여하는 아나운서를 오락을 겸하는 아나운서라는 의미에서 ‘아나테이너’라고 부르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아나운서라고 오락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오락프로그램에서 최근 유행하던 춤을 열심히 추던 아나운서가 뉴스시간에 나와서 아나운서의 전형적인 얼굴로 뉴스를 진행하는 것은 어쩐지 좀 어색하다. 그러나 밤 9시 뉴스에 연예인의 결혼소식이 그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나운서가 오락프로그램에 가는 것과 9시 뉴스에 연예인의 결혼 소식이 등장하는 것이 다른 현상이 아니라 같은 현상이 다른 얼굴로 등장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어디 뉴스만 그런가.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되는 토론 프로그램도 어떤 패널이 토론자로 섭외되느냐에 따라 가끔은 재미없는 오락프로그램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방송 프로그램 중 가장 딱딱하고 재미와는 관계없는 분야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이 정도이니 원래 재미를 추구하던 오락프로그램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텔레비전 전체가 지루하고 심각하고 딱딱한 내용을 버리고 말랑말랑해지고 있다. 이런 방송의 연성화(軟性化)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달라진 점은 뉴스의 소재가 다소 어둡고 심각한 정치·경제적인 문제에서 재미있고 가벼운 정보들로 옮겨가는 것에서 시작된 연성화가 이제 텔레비전 전체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고 그 진행 방식도 가히 전면적이라는 것이다.
언론의 중요 기능 중에 ‘의제설정기능’이라는 것이 있다.언론은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의 중요 문제가 뭐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주로 그런 기능은 뉴스가 담당한다. 방송사들의 입장에서는 아나운서들의 오락 프로그램으로의 진출이 이런 기능의 축소와는 상관없다고 말하겠지만, ‘오락적 기능’과 ‘의제설정 기능’이라는 분명히 다른 두 영역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아나운서들이 등장해서 진행하는 오락프로그램이 방송되는 시간에 뉴스를 방송해야 하는 또다른 방송사는 시청자를 잡기 위해 무겁고 딱딱한 소재의 뉴스보다는 ‘보는 뉴스와 팔리는 뉴스’에 몰두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이슈가 적어도 아나운서의 연애담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무한도전’의 한 출연자가 프로그램 말미에 자신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시청자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 다큐멘터리나 환경 다큐멘터리를 보노라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오지에서 또는 거의 짐승과 같은 환경에서 작업한 사람들은 정말 죽을 힘이 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프로그램을 자주 보고 싶다. 그것도 내일 일에 지장을 줄까 염려하며 눈 비비며 보는 새벽 1시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시간에 말이다. 시청자들은 오락물이 아니라도 텔레비전과 더불어 즐거울 수 있다. 게다가 시청자들은 오락물에 슬슬 지쳐가는 것 같아 보인다. ‘아나테이너’들의 투입에도 시청률은 별로라니 말이다. 식상해진 것이다.
어디 뉴스만 그런가.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되는 토론 프로그램도 어떤 패널이 토론자로 섭외되느냐에 따라 가끔은 재미없는 오락프로그램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방송 프로그램 중 가장 딱딱하고 재미와는 관계없는 분야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이 정도이니 원래 재미를 추구하던 오락프로그램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텔레비전 전체가 지루하고 심각하고 딱딱한 내용을 버리고 말랑말랑해지고 있다. 이런 방송의 연성화(軟性化)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달라진 점은 뉴스의 소재가 다소 어둡고 심각한 정치·경제적인 문제에서 재미있고 가벼운 정보들로 옮겨가는 것에서 시작된 연성화가 이제 텔레비전 전체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고 그 진행 방식도 가히 전면적이라는 것이다.
언론의 중요 기능 중에 ‘의제설정기능’이라는 것이 있다.언론은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의 중요 문제가 뭐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주로 그런 기능은 뉴스가 담당한다. 방송사들의 입장에서는 아나운서들의 오락 프로그램으로의 진출이 이런 기능의 축소와는 상관없다고 말하겠지만, ‘오락적 기능’과 ‘의제설정 기능’이라는 분명히 다른 두 영역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아나운서들이 등장해서 진행하는 오락프로그램이 방송되는 시간에 뉴스를 방송해야 하는 또다른 방송사는 시청자를 잡기 위해 무겁고 딱딱한 소재의 뉴스보다는 ‘보는 뉴스와 팔리는 뉴스’에 몰두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이슈가 적어도 아나운서의 연애담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무한도전’의 한 출연자가 프로그램 말미에 자신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시청자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 다큐멘터리나 환경 다큐멘터리를 보노라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오지에서 또는 거의 짐승과 같은 환경에서 작업한 사람들은 정말 죽을 힘이 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프로그램을 자주 보고 싶다. 그것도 내일 일에 지장을 줄까 염려하며 눈 비비며 보는 새벽 1시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시간에 말이다. 시청자들은 오락물이 아니라도 텔레비전과 더불어 즐거울 수 있다. 게다가 시청자들은 오락물에 슬슬 지쳐가는 것 같아 보인다. ‘아나테이너’들의 투입에도 시청률은 별로라니 말이다. 식상해진 것이다.
-김상호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영남일보 : 2008.01.28]